백씨 족보

백씨의 원계

관악산☆ 2010. 1. 20. 17:44

 

백씨의 원계(遠系)

우리 백씨는 모두가 시조 송계공(松溪公)의 후손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니 송계공부터 계세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앞의 [계세와 중시조]에서 규명한 것처럼 연계하는 데 여러 가지 모순과 무리가 따른다.
이런 까닭에 과거 병신보(서기 1776년 발간)는 득장(得璋)과 득기(得琦), 광원(光元)과 광형(光亨), 대원(大元)과 대의(大義), 진국(進國)과 진방(進邦) 진문(進門), 홍준(弘俊)과 홍걸(弘傑)등 5대만을 형제로 적고 그 이하 창직까지는 세대를 밝히지 않고 휘(諱:이름)만을 기록했다. 그 뒤 정사, 갑자, 기해 등 세대동보는 선례에 따라 위의 5대만을 형제로 기록하고 나머지는 부자로 하여 모두 15대로 연계했다. 그러나 지난번 임술보는 위에서 지적한 모순을 시정하기 위해 중시조 이상을 원계로 모시고 중시조를 1세로하여 계세했다. 이번 정축대동보도 임술보의 선례에 따른다.

始       祖
白宇經(백우경)

시조 송계공 휘 우경 영정


字는 경천(擎天)이요 號는 송계(松溪)인데 唐나라 소주(蘇州)사람이다.
唐나라 조정에서 첨의사(僉議事) 좌복야 사공대사도(左僕射司空大司徒) 벼슬에 올랐으나 간신배의 모함을 당하자 스스로 당나라를 떠나 신라로 망명해 계림자옥 산하(鷄林紫玉山下 : 現 慶北月城郡安康邑玉山洞)에 거처를 정했다. 그 때는 신라 선덕왕(宣德王) 元年(서기780년 庚申)이었다. 그는 그 후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大相)에 올랐다.
그가 자옥산 아래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을 지우니 宣德王이 몸소 찾아와 만세암을 정혜사(淨惠寺)라는 이름으로 고쳤다. 하도 세월이 오래되니정혜사의 불당은 없어지고 그 안에 세웠던 13층 석탑만이 남아 국보제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또 선덕왕은 친히 붓을 들어 영월당 현판에 경춘(景春)이라 쓰고 아울러 사운시(四韻詩)를 지어 주었기 그것을 새겨 걸었다고 한다.
경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동경통지(東京通誌) 제7권 불사편(佛寺篇)에 보면 『淨惠寺惠址 在紫玉 山下 新羅 宣德王庚申 唐朝僉議事白宇經 被讒來寓干紫玉山下 建迎月堂萬歲庵 宣德王幸行 改庵爲淨惠寺爲景春 云云』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또 여러 종중의 보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는 자옥산 옥천동(紫玉山 玉泉洞) 용추(龍湫) 남쪽에 살면서(현재도 상용추, 하용추가 있음) 唐의 황제가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간청했으나 그는 끝내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살다가 영월당에서 일생을 마쳤는데 향년 73세였다.
그는 재실(齋室)을 곡리(穀里)에 짓고 널리 후학(後學)을 모아 가르쳤는데 그것이 우리 나라 學校의 효시라고 한다. 묘는 옥산 남쪽 기슭에 있어 그 곳 주민들은 白정승묘라 전해왔다고 하나 그것을 알길이 없어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시조 송계공이 건너온지 천백수십년이 지난 1959년 기해대동보를 수보한 뒤 우리는 뜻있는 일가들을 중심으로 추심운동(推尋運動)을 전개했다. 그래서 10여년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에 드디어 자옥산 남쪽 기슭 경좌갑향(庚坐甲向)에 있는 시조 송계공의 고분(古墳)을 찾아내는데 성공했다.
오백(吾白)은 온갖 정성을 한곳에 결집하여 1966년 11월 10일 사초개봉(莎草改封)하고 다음 해 11월 신도비묘비(神道碑墓碑)와 다른 부속 석물을 구전하고 1968년 음력 4월 8일에 첫 제향을 올렸다.
이어 중앙화수회는 1975년 3월 30일 총회에서 묘 아래에 재실을 짓기로 의결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22일 재실 건립에 착수하여 11월 1일 상량(上樑)하고 1977년 2월 28일 완공했다. 그리고 옛 기록에 따라 이름을 영월당(迎月堂)이라 복원하여 해마다 양력 5월 첫째 일요일을 제향일로 정하여 향사(享祀)를 모시고 있다.

靖(정)



벼슬은 삼중대광 우간의대부(三重大匡右諫議大夫)로 참소를 받아 대우도(大牛島)에 귀양갔다가 이듬해 봉화현(現慶北奉化)에 옮기시어 2년뒤에 풀려났으나 다시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다고 한다. 묘는 송계공 묘아래 자좌(子坐)라고 하나 찾지 못하여 영월당 경내에 사공단비(四公壇碑)를 세워 공이하 4대를 합사(合祀)하고 있다.

立昇(입승)



字는 자평(子平)이요 벼슬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中國에 건너가 서주대도독(徐州大都督)을 지내다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또는 애장왕(哀莊王)때 각간시중(角干侍中) 벼슬로서 당나라 임금의 부름을 받고 가서 자광록대부(金紫光綠大夫) 서주도독대윤(徐州都督大尹)을 제수하고 9년만에 돌아왔다고도 한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左岡外壬坐)라고 한다.

尙(상)



字는 여화(汝和)이며 한주태수(漢州太守)를 지냈다. 묘는 송계공 묘 아래 좌강외 임좌라고 한다.

永(영)



字는 구지(久之)이며 시호(諡號)는 문원(文元)이다. 신라 헌덕왕 丙午년(서기826년)에 우잠태수(우잠은 현 황해도 금천군)가 되자 한산이북(漢山以北) 주민들 일만명을 동원하여 패강장성(패강은 현 대동강) 300리를 구축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삼국사와 대구 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경주읍지(慶州邑誌) 제2권에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에 가서 첨의사를 지내고 4년 뒤에 돌아와 우잠태수가 되었다고도 전한다. 묘는 송계공 묘 옆에 있다고 한다.

延福(연복)



字는 덕이(德而)이고 시호(諡號)는 충정(忠正)이며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다. 中國에 가서 대양도독(大梁都督)을 지내고 돌아왔다고 한다. 묘는 하양현(지금 경산군 하양읍)에 있다고 한다.
배우자는 수인성덕대자공주(垂仁聖德大慈公主)金氏인데 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의 따님이시다.

仲鶴(중학)



字는 운로(雲路)요 시호는 익열(翼烈)이다. 벼슬은 헌안왕(憲安王)때 삼중대광 좌간의대부(三重大匡左諫議大夫)에 올랐는데 그 사적(事蹟)이 여지승람(與地勝覽) 남포인물론(藍浦人物論)에 실려 있다. 묘는 남포현 쌍계산에 있다고 하나 실전(失傳)이다. 또는 남포현 계림산임좌에 있다고도 하고 영풍현(지금의 경북 영풍군)에 있다고도 한다.
배(配)는 경주김씨인데 시중 김탕의 딸이다. 묘는 쌍봉(雙封)이다.

得璋(득장)



헌강왕(憲康王)때 이부시랑(吏部侍郞)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또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시랑(尙書侍郞) 평장사(平章事)에 올랐다고도 하며 개주(지금의 개성)에 살았다고 한다.
배(配)는 김씨인데 어사대부 김일(金鎰)의 딸이다.
득기(得琦)라는 아우가 있는데 벼슬은 문하성사(門下省事)라고 한다.
그의 배(配)는 홍씨인데 홍감경의 딸이다.

光元(광원)



호는 연정(烟亭)이요 시호는 소장(昭章)이며 벼슬은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학평장사(光祿大夫門下侍中政堂文學平章事)다. 그의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 그 때 사람들이 옛날의 이윤(伊尹)과 여상(呂商)의 반열(斑列)이요 소하(蕭何)와 조삼(曺參)의 여주(與주)라고 칭송하였다고 한다. 고운최치원(孤雲崔致遠)선생이 찬명(撰銘)하고 묘는 남포현 양각산 동막동 갑좌인데 중세(中世)에 실전되었다가 영조 경신년 여름(서기 1740년)에 후손 시규(時糾)가 지석(誌石)을 찾아 개봉(改封)하고 매년 양력 10월 마지막 일요일에 향사(享祀)하고 있다.
배(配)는 박씨인데 한림학사 박몽성의 딸이다.
광형(光亨)이라는 아우가 있는데 벼슬은 밀직부사(密直副使)다.

大仁(대인)



자는 은삼(殷三)이요 호는 관죽당(觀竹堂)이며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어제(御製)에 말씀하시기를 公은 孔子를 배우고 안자(顔子)를 사모(思慕)하여 정도(正道)에 변함이 없었다한다. 벼슬은 광록대부 정당문학 태자태부 평장사(光祿大夫 政堂文學 太子太傳 平章事)다.
배(配)는 완산이씨니 사공 벼슬을 지낸 이한의 딸이다.
대의(大義)라는 아우가 있는데 그의 벼슬은 예부시랑이다.

進邦(진방)



호는 고와(孤窩)요 시호는 경열(敬烈)이다. 벼슬은 광록대부 중서성상장군(光綠大夫 中書省上將軍)이며 고운 최치원선생(孤雲 崔致遠先生)이 전서(篆書)한 찬지(撰誌)가 있다한다.
배는 상덕화양공주 김씨인데 정강왕 김황의 딸이다.
그의 형은 진국(進國)인데 벼슬은 광록대부 좌시랑 태자태부이며 무후(無后)이다.
그의 아우는 진문(進門)인데 중국에 들어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時顔(시안)



자는 내연(乃淵)이요 벼슬은 광록대부 문하성사(光綠大夫 門下省事) 또는 문하시중 대사도(門下侍中 大司徒)라고도 한다.
배(配)는 박씨인데 시중 벼슬을 지낸 박오의 딸이다.

瑨(진)



중국에 가서 국자진사(國子進士)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배(配)는 김씨인데 원외랑 김성한의 딸이다.
弘俊(홍준)



호는 담재(澹齎)인데 중국에 가서 국자생원(國子生員)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배(配)는 배씨인데 한림학사 배천서의 딸이라고 한다. 또 이씨라는 설도 있다.
아우는 홍걸(弘傑)인데 광록대부 정당문학 평장사 벼슬을 지냈다.
홍걸의 배(配)는 최씨인데 좌복야 최등완의 딸이다.
昌稷(창직)

중시조 영희공 휘 창직 영정

중시조(中始祖)다. 백씨는 중시조를 1세(世)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자는 화숙(和淑)이고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신라말엽 경명왕조(서기 917~922)때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고 증직(贈職)이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이다. 묘는 예천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하고 신위는 시조 송계공 재사 영월당과 충남 보령군 웅천면 평리 동막동 옥산사에 모시고 있다.
배(配) 상화공주는 경명왕 박승영의 딸인데 소생은 없다.
배(配) 진천임씨는 산중대광일흥군 희의 딸이다.


*출처: 수원백씨 중앙종친회 http://www.suwonbaek.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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