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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신라왕조실록 간단정리

관악산☆ 2010. 3. 3. 10:36

우리의 삼국시대 역사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에 남아있다. 

참고한 책에서는 "삼국사기"를 기본으로하여 "삼국유사" 중국의 "삼국지" "자치통감"

일본의 "일본서기" 등을 참고하여 신라왕조 역사를 추적하고 있다.

다음은 신라왕조 계보와 약사를 참고한 책 위주로 간단히 정리해본 것이다. 

 

▦ 신라왕조실록(新羅王朝實錄) 간단정리 ▦

 

혁거세거서간 [赫居世居西干] - 시조. 61년(BC57~AC4년). 73세 사망

▷성은 박(朴)씨. 이름은 혁거세. 왕비는 알영(閼英)

▷백마난생설화(白馬卵生說話) -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蘇伐公)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곁의 숲 사이로 흰말이 무릎 꿇고 있었다. 가보니 큰 알이 있어 깨었더니 아이가 나왔다.

   6부 사람들은 출생이 신기한 이 아이를 10여세 때 왕으로 세우고, 혁거세가 나온 큰 알이 표주박 같이 생겨서 성을 박(朴)씨로 삼았다.

▷왜의 침입 - 즉위 8년

▷왕비와 함께 민정시찰/ 즉위 17년 - 농업과 양잠을 장려, 감독

▷변한이 항복해옴 - 즉위 19년

▷도읍 금성 축성 - 즉위 21년

▷낙랑군 침입, 스스로 물러감 - 즉위 30년

▷마한에 수교사신 파견/호공(瓠公) - 호공과 마한왕의 말다툼 일화

 

남해차차웅 [南解次次雄] - 2대. 20년(AC4~24년)

▷성은 朴씨. 혁거세의 장남. 왕비는 雲帝夫人(阿婁夫人)

▷낙랑군 침입, 격퇴 - 즉위 원년

▷탈해를 맏사위로 삼음 - 대보로 임명, 병권책임자 - 즉위 5년

▷왜군 침입, 낙랑 금성 침입 - 즉위 11년

▷강릉에서 밭 갈다가“예(濊)”라고 새겨진 도장 발견 - 즉위 16년

 

유리이사금 [儒理尼師今] - 3대. 33년(24~57년)

▷성은 朴씨. 남해의 장남. 별명 弩禮尼叱今. 왕비는 일지갈문왕의 딸 박씨(?)

▷민심 탐방 후 전국적 불우백성 구제 - 홀아비, 홀어미, 고아, 무자식자

▷도솔가(兜率歌) - 작자미상의 가악, 슬픈 가사와 사뇌라는 운율

▷6부의 명칭변경과 성씨 하사 - 양부 이씨, 사량부 최(또는 정)씨, 모량부 손씨, 본피부 정(또는 최)씨, 한지부 배씨, 습비부 설씨.

▷17관등제 시행(?) - 1이벌찬, 2이찬, 3잡한, 4파진찬, 5대아찬, 6아찬 ~~17~

▷가배(嘉俳)놀이 - 6부 변경기념으로 6부 여자를 두 편으로 갈라 8월 보름까지 한 달간 길쌈 시합하여 진편에서 음식대접하고

                           노래(회소곡)와 춤추며 놀았다 - 한가위의 원형

▷낙랑백성 5천명 귀순 - 함경남도 동해안의 낙랑

▷매형인 탈해에게 선양 - 탈해의 재능이 자신의 두 아들보다 뛰어나다는 이유

 

탈해이사금 [脫解尼師今] - 4대. 23년(57~80년). 99세 사망

▷성은 석(昔)씨. 남해의 사위, 유리의 매형, 다파나국(多婆那國) 왕자, 별명 토해(吐解)

▷탈해 설화 - 알에서 탄생

▷마한 장수 孟召가 복암성을 바치며 투항

▷백제왕의 화친제의 거절 - 낭자곡성(보은)까지 친히 찾아옴

▷김알지를 양자로 삼음

▷김알지 탄생설화 - 시림 숲속 황금상자에서 사내아이를 발견하고 왕의 양자로 삼아 김알지(金閼智-경주김씨 시조)라 하고

                            시림을 계림(鷄林)으로 이름하고 국호로 삼았다.

▷갈문왕(葛文王)제도 - 왕과 일정한 관계를 가진 최고 성씨집단의 씨족장 또는 가계의 장 에게 준 칭호

 

파사이사금 [婆娑尼師今] - 5대. 32년(80~112년)

▷성은 朴씨. 유리의 차남(?-유리 아우 내로의 아들). 왕비는 許婁갈문왕 딸 史省부인 김씨

▷장남보다 위엄과 현명함이 앞서 먼저 즉위

▷시조 묘에 제사. 민심탐방 후 가난한 백성구제

▷농사와 양잠권장. 병기정비와 군사훈련

▷가소성(加召城)과 마두성(馬頭城) 축조 - 거창부근, 금성이외 최초의 국방경비시설

▷가야와 잦은 충돌 - 즉위 15년, 17년, 23년

 

지마이사금 [祗摩尼師今] - 6대. 22년(112~134년)

▷성은 朴씨. 이름은 祗味, 祗磨. 파사의 아들. 왕비는 摩帝갈문왕의 딸 愛禮부인 김씨

▷백제와 수교

▷말갈의 강릉 침입, 격퇴 - 백제의 구원병 도움

▷가야와 충돌 - 즉위 4년, 5년

 

일성이사금 [逸聖尼師今] - 7대. 20년(134~154년)

▷성은 朴씨. 유리의 아들(?-아도갈문왕의 아들). 왕비는 支所禮王의 딸 박씨

▷금성에 정사당(政事堂) 설치 - 화백회의 장소(?) 추정

▷농지개간과 제방수리 지시, 민간의 금은주옥 사용금지

▷압독국(押督國/경산)의 반란, 평정

▷남쪽지방에 극심한 가뭄 - 타 지역 식량을 옮겨 백성구제

 

아달라이사금 [阿達羅尼師今] - 8대. 30년(154~184년)

▷성은 朴씨. 일성의 장남. 왕비는 지마의 딸 박씨(8촌내 족내혼)

▷계립령(鷄立嶺/문경새재 동쪽)과 죽령 개통

▷아찬 길선(吉宣)의 모반사건

▷백제와의 전쟁 - 한강유역 공격, 영토 확장(?)

▷왜 여왕 비미호(卑彌乎)가 사신파견 수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설화 - 삼국유사

 

벌휴이사금 [伐休尼師今] - 9대. 12년(184~196년)

▷성은 昔씨. 탈해 아들 仇鄒의 아들(? -후손)

▷아달라 아들 없음, 새로운 지배세력 출현(?) 추정

▷백제의 원산향(예천)과 부곡성(군위) 침입 - 파진찬 仇道가 나섰으나 대패, 좌천 

 

내해이사금 [奈解尼師今] - 10대. 34년(196~230)

▷성은 昔씨. 벌휴의 손자, 이매의 아들. 왕비는 조분이사금의 누이 석씨(4촌간 근친혼)

▷벌휴의 두 아들이 일찍 죽고, 큰 아버지 아들이 어려서 내해가 즉위

▷백제와 잦은 충돌 - 즉위 4년에 국경, 19년에 요차성과 장산성(경산) 침입, 격퇴

▷浦上八國(낙동강의 8개소국) 가야 침공에 지원 - 태자 우로 등이 출병하여 격파

 

조분이사금 [助賁尼師今] - 11대. 17년(230~247년)

▷성은 昔씨. 벌휴의 손자, 공정갈문왕의 아들. 왕비는 내해의 딸 아이혜부인(5촌간 근친혼)

▷벌휴의 장손자 - 내해의 유언에 따라 즉위

▷주변 소국들을 병합 - 감문국(김천)과 골벌국(영천) 정벌, 고타군(안동)까지 세력 확장

▷고구려군 침입, 퇴각 - 우로장군 활약

 

첨해이사금 [沾解尼師今] - 12대. 14년(247~261년)

▷성은 昔씨. 조분의 아우

▷고구려에 사신파견 - 고구려의 보호국

▷왜군의 금성 침입 - 우로 대장군 왜군들이 살해

▷백제의 봉산성 침입, 격퇴

▷영토 확장 - 달벌성(대구) 축조, 사벌국(상주) 점령하여 진한 전 지역 통일(?) 추정

▷昔于老 -내해의 태자, 이찬 대장군 벼슬. 영토 확장, 고구려와 왜 침입 때 맹활약

 

미추이사금 [味鄒尼師今] - 13대. 22년(262~284년)

▷성은 金씨. 조분의 사위, 김알지 후손.

▷김알지-> 勢漢-> 阿都-> 首留-> 郁甫-> 仇道-> 미추 - 삼국유사에는 熱漢, 郁部

▷첨해에게 아들이 없고, 갑자기 죽어서 나라사람들이 추대(선양? - 삼국유사)

▷김알지 사당에 제사,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함

▷백제군 봉산성 침입, 격퇴

▷극심한 가뭄으로 남당에서 대책회의 - 즉위 7년

▷화려한 궁궐증축 건의를 거절 - 백성 피해 이유

▷백제군 괴곡성 침입, 격퇴 - 즉위 17년, 22년

 

유례이사금 [儒禮尼師今] - 14대. 14년(284~298년)

▷성은 昔씨. 조분왕의 장자(? - 가공인물?)

▷3대 유리왕과 동명(의문점) - 두 임금 모두 儒理 또는 儒禮로 썼다.

▷왜국 정벌계획 - 서불한 弘權의 만류로 취소

 

기림이사금 [基臨尼師今] - 15대. 12년(298~310년)

▷성은 昔씨. 조분왕의 손자(? - 가공인물?)

▷비열홀(안변)과 우두주를 순행하며 태백산에 망제를 지냄(?)

▷낙랑과 대방군 두 나라가 귀속함(?)

▷국호를 신라로 정함(?)

 

흘해이사금 [訖解尼師今] - 16대. 46년(310~356년)

▷성은 昔씨. 내해왕의 손자(?), 각간 우로의 아들(? - 연대?)

▷기림왕이 후사가 없자 여러 군신들이 의논하여 총명한 흘해를 추대.

▷왜국왕의 아들과 아찬 急利의 딸을 혼인시킴/즉위 3년 - 왜와 유화책

▷왜의 신라왕실과의 혼인요구에 거절 - 즉위 35년

▷왜의 금성침입, 노략질, 퇴각 - 즉위 37년

▷벽골지(碧骨池/김제) 저수지를 쌓음(? - 백제 땅) - 즉위 21년

▷큰 홍수로 관청과 가옥이 유실되고, 산이 열세 개나 무너짐 - 즉위 41년

 

내물마립간 [奈勿麻立干] - 17대. 46년(356~402년)

▷성은 김(金)씨. 구도갈문왕의 손자, 각간 末仇의 아들. 왕비는 미추왕의 딸 保反부인 김씨

▷흘해왕 후사 없음 - 강력한 김씨씨족에서 옹립(?) 추정

▷진한 전체를 통합한 고대국가의 면모를 형성하나 고구려의 보호국

▷불우백성 구제/즉위 2년 - 과부나 홀아비 등에 곡식 석곡씩 하사

▷행실이 착한 관리들에게 관직 한 급씩 특진 - 즉위 2년

▷왜군 대군 침입, 섬멸 - 즉위 9년, 38년

▷고구려에 이찬 대서지의 아들 실성을 볼모로 보냄 - 즉위 37년(? - 연대?)

▷백제와 왜 연합군 침입/즉위 44년 - 고구려 5만대군 구원으로 대파(광개토왕릉비문)

▷메뚜기 떼가 들판을 뒤덮음 - 즉위 44년

▷백제 독산성주가 300명과 함께 귀순 - 즉위 18년

▷중국 전진에 사신파견 - 즉위 26년

▷하슬라(河瑟羅/강릉)의 가뭄 구제 - 즉위 42년

 

실성마립간 [實聖麻立干] - 18대. 15년(402~417년)

▷성은 金씨. 이찬 대서지의 아들. 왕비는 미추왕의 딸 阿留부인

▷내물왕의 아들들이 어려서 화백회의에서 추대 - 고구려의 후원(?) 추정

▷未斯品을 서불한으로 삼고 군국의 임무를 전담시킴

▷내물왕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일본에 볼모로 보냄

▷내물왕 아들 복호(卜好)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냄

▷내물왕 아들 눌지의 반란 - 실성왕의 눌지 제거음모에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왕 살해

 

눌지마립간 [訥祗麻立干] - 19대. 41년(417~458년)

▷성은 金씨. 내물왕의 장남. 왕비는 신성왕의 딸

▷동생 복호의 고구려 탈출, 미사흔 일본에서 귀국 - 朴堤上(또는 金堤上)의 활약

▷기근으로 자식을 파는 자가 생김 - 즉위 4년

▷고구려에 사신파견, 외교관계 유지 - 즉위 8년

▷백제와 동맹 맺음 - 즉위 17년

▷고구려의 백제침공 때 백제에 군사파견 - 즉위 39년

▷일본의 수차례 침입, 격퇴

▷하슬라 성주 三直의 고구려 성주 살해사건으로 고구려 침입 때 사신파견으로 무마

▷고구려에서 온 인도승려 墨胡子가 최초로 불교 전래

 

자비마립간 [慈悲麻立干] - 20대. 21년(458~479년)

▷성은 金씨. 눌지왕의 장남. 왕비는 내물왕 아들 미사흔의 딸 김씨(사촌과 근친혼)

▷6부를 개편하여 경주를 부족연합적 성격에서 행정적 성격으로 변화

▷나제동맹 강화 - 백제 개로왕의 구원요청에 군사파견

▷니하(강릉 남대천), 삼년산성(보은)등 고구려 국경지역에 축성

▷왜군의 삽량성(양산) 침입, 대파

 

소지마립간 [炤知麻立干] - 21대. 21년(479~500년)

▷성은 金씨. 자비왕의 장남. 별명 毗處麻立干. 왕비는 이벌찬 乃宿의 딸 선혜(善兮)부인

▷각 지방에 郵驛설치, 官道개척

▷경주에 최초의 시장개설

▷각 지방 순행으로 병사와 백성위문, 유랑백성 정착 및 농업에 종사케 함

▷백제와 결혼동맹 - 이찬 비지의 딸을 백제왕실과 결혼

▷고구려의 청송부근 7개성 침입/말갈연합/ 즉위 3년 - 백제 가야연합군과 격퇴

▷고구려의 문경 침입/ 즉위 16년 - 백제 동성왕 지원으로 격퇴

▷고구려의 잦은 침입 - 즉위 17년, 18년, 19년

▷烏忌日 풍습 - 정월 15일에 찰밥으로 제사 지내고, 행동거지를 단정히 함 - 삼국유사

 

지증왕 [智證王] - 22대. 14년(500~514년). 78세 사망

▷성은 金씨. 이름은 智大路, 智度路, 智哲路. 내물왕의 증손, 習寶 갈문왕의 아들. 왕비는 이찬 登欣의 딸 延帝부인 박씨.

▷재종형인 소지왕이 후계가 없자 64세에 즉위. 기골이 장대, 담력이 있음, 음경이 1자5치

▷순장금지법령 시행

▷농업권장과 우경법 보급, 벼농사 확대보급

▷국호를 新羅로 확정 - 新者德業日新 羅者綱羅四方之義 라는 의미

▷존호를 王으로 변경 - 중국식 명칭

▷지방의 州郡縣제도 확립

▷동북방면국경에 12개 성 축조, 아시촌(阿尸村/함안)에 小京 설치

▷우산국(于山國/울릉도) 정복 - 이사부

▷지증이라는 최초 시호사용

 

법흥왕 [法興王] - 23대. 26년(514~540년)

▷성은 金씨. 이름은 原宗. 지증왕의 아들. 왕비는 保刀부인 박씨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완비와 불교 개화(王卽佛 사상)

▷병부(兵部) 설치 - 군사권을 왕이 직접 장악

▷율령(17관등과 골품제?) 반포와 백관의 공복제정

▷왕실에서 불법 봉행 - 신라 최초

▷상대등(上大等)이란 기구설치 - 이찬 哲夫를 최초의 상대등으로 임명

▷가야와 혼인동맹 - 이찬 比助夫의 누이동생을 시집보냄

▷가야를 신라에 합병 - 금관국왕 仇衡王 金仇亥가 항복, 김구해를 상등의 벼슬과 가야지역을 식읍으로 하사하고,

                                 아들 김무력(김유신의 조부)은 각간 벼슬.

▷건원(建元)이라는 연호사용

▷양나라에 사신파견

▷이차돈의 순교 - 다음해에 불교 공인, 신라 최초의 절 대흥륜사 건립

▷진흥왕에게 선위 후 승려가 됨 - 법호는 법공

 

진흥왕 [眞興王] - 24대. 36년(540~576년). 43세 사망

▷성은 金씨.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深麥夫. 지증왕의 손자, 법흥왕 아우 立宗갈문왕의 아들. 왕비는 思道부인 박씨

▷7세에 즉위, 왕태후 김씨가 섭정

▷개국(開國)이라는 연호 사용 - 즉위 12년부터

▷흥륜사 완공, 일반인들의 출가 허용

▷[국사] 편찬 - 이사부의 건의

▷고구려의 백제 독산성 침입/말갈연합군, 격퇴 - 백제와 동맹에 따른 지원

▷양나라에서 사신파견, 불사리 전달

▷도살성과 금현성을 함락, 성 증축, 군사주둔

▷우륵(于勒)과 가야금 - 왕이 가야금에 심취

▷궁전 신축 --> 황룡출현 --> 황룡사(皇龍寺) 사찰로 변경

▷나제동맹 깨짐 -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 침공 후 한강유역 점령 배신

▷백제의 관산성 침입, 격퇴 - 백제 성왕과 4명의 좌평, 3만 군사 전사시킴

▷비사벌(창녕) 정벌, 완산주 설치, 아라가야와 비화가야국 합병

▷대가야의 반란, 진압, 멸망시킴 - 이사부장군 활약

▷대야주(합천) 설치 - 가야의 낙동강 전 유역

▷비열홀주(안변지역) 설치 - 함흥평야지역까지 세력 확산

▷진흥왕 순수비(巡狩碑) - 창녕비, 함흥의 황초령비, 이원군의 마운령비, 북한산비

▷황룡사 장육상(丈六像) 조성

▷기원사(祇園寺)와 實際寺 건립

▷승려 명관(明觀)이 진나라에서 불경 1,700여 권 가져옴

▷안홍(安弘)법사가 수나라에서 능가만경(稜加鬘經)과 부처님 진신사리 가져옴

▷팔관연회(八關筵會) 개최 - 7일간 전사자들의 영혼을 천도함

▷왕의 법호를 法雲이라하고 승려로서 여생을 마침

▷화랑도(花郞徒) 창설 - 전륜성왕으로 자처한 진흥왕이 화랑을 통해 미륵세상 구현시도(?)

 

진지왕 [眞智王] - 25대. 3년(576~579년)

▷성은 金씨. 이름은 舍輪, 金輪. 진흥왕의 차남. 왕비는 知道부인

▷거칠부를 상대등에 임명 - 즉위 원년

▷백제군의 서쪽국경 침입, 격퇴 - 이찬 世宗 활약

▷내리서성 축조

▷진나라 사신파견, 외교수립

▷화백회의 결정으로 폐위 - 정치를 어지럽히고 음란행위를 일삼은 이유

 

진평왕 [眞平王] - 26대. 53년(579~632년)

▷성은 金씨. 이름은 백정. 진지왕의 조카. 왕비는 福勝갈문왕의 딸 摩耶부인 김씨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에 임명 - 즉위 원년

▷지증왕 후손인 이찬 후직(后稷)을 병부령에 임명 - 즉위 2년

▷중앙집권체제 개편 - 位和部, 船府署, 調部, 乘部, 禮部 설치

▷수나라에 사신파견과 조공으로 외교

▷불교의 수용과 보급 - 원광법사의 화랑도 세속오계

▷고구려 백제의 침입 - 즉위 24년 (백제가 아막성), 25년(고구려가 북한산성)

▷수나라 수양제에게 乞師表 보냄 - 수나라의 고구려 정벌, 실패

▷백제의 침입, 5개성 함락 - 즉위 33년, 38년, 46년

▷고구려 낭비성 공격/ 즉위 51년 - 김유신 활약

▷이찬 칠숙(柒宿)과 石品의 반란, 진압

▷당나라에 사신파견, 외교수립 - 미녀 2명 공물로 바치나 거절당함

▷서동요와 선화공주 - 즉위 21년

 

선덕왕 [善德王] - 27대. 15년(632~647년)

▷성은 金씨. 이름은 德曼. 진평왕의 장녀

▷아들이 없어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 聖祖皇姑로 부름, 동생은 선화공주

▷최초의 女王 - 聖骨男盡과 왕권견제로 권한을 확대하려는 화백회의의 야심작(?)

▷善德王知幾三事 - 선덕왕의 총명함을 보여주는 3가지 일화

▷당나라에 매년 사신파견과 조공 - 즉위 원년부터

▷분황사 완공 - 즉위 2년

▷백제군 침입, 격퇴 - 즉위 5년

▷고구려군 침입, 격퇴/알천장군 활약 - 즉위 7년

▷당나라에 유학생 파견 등 인재육성 - 즉위 9년

▷백제 의자왕의 침입 - 서쪽 40여 개성 함락

▷고구려 백제연합군 침입 - 당항성(화성 남양면) 함락

▷백제군 침입, 대야성 함락 - 김춘추 사위 김품석장군과 부인, 화랑들이 전사

▷김춘추 연개소문과 담판 결렬, 고구려에 연금 - 김유신 출병(?)으로 김춘추 석방

▷김유신 압량주(경산) 군주 임명 - 백제 침입대비

▷고구려 백제를 치도록 당태종에 구원요청 - 즉위 12년(3가지 조건 들어 거절), 13년

▷당태종의 고구려 1차 정벌과 신라의 출병 - 안시성싸움에서 당태종 이세민 패퇴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 김춘추와 김유신이 진압 - 화백회의의장 비담과 김춘추파의 권력투쟁(?) 추정

▷반란 중 선덕여왕 갑자기 사망 

 

진덕왕 [眞德王] - 28대. 7년(647~654년)

▷성은 金씨. 이름은 승만. 진평왕 아우 國飯갈문왕의 딸

▷비담 등 반란 주모자 30명 처형,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 - 즉위 원년

▷고구려 백제의 잦은 침입 - 당나라에 사신파견과 구원요청, 진덕왕 자작시 “태평송“

▷中朝衣冠制 시행 - 즉위 3년 - 김춘추의 대당 외교전략

▷당고종 연호인 영휘(永徽) 사용 - 김춘추의 대당 외교전략

 

태종무열왕 [太宗武烈王] - 29대. 7년(654~661년) 60세 사망

▷성은 金씨. 이름은 춘추. 진지왕의 손자, 이찬 김용춘의 아들. 왕비는 각찬 김서현의 딸, 김유신의 누이동생인 文明부인

▷용모가 수려하고 사려가 깊고 화술이 빼어남, 53세에 즉위

▷최초의 진골출신 왕 - 화백회의에서 추대

▷60여 개의 율령 반포,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의 북쪽 33개 성 침입 - 당나라에 구원요청, 당의 고구려 공격

▷나당연합군 백제 정벌 - 13만 당나라 군사와 소정방

▷황산벌 전투 - 김유신과 계백장군, 어린 盤屈과 官昌의 용맹

▷사비성 함락과 百濟 滅亡 - 웅진성으로 탈출했던 의자왕이 태자와 항복

▷명장 김유신(金庾信) - 김수로왕의 9대손으로 증조부가 신라에 귀순, 아버지 김서현이 왕족과 혼인,

                                  15세에 화랑이 되어 20년간 정신수양과 무예수련

 

문무왕 [文武王] - 30대. 20년(661~681년)

▷성은 金씨. 이름은 법민. 태종무열왕의 장남. 왕비는 파진찬 善品의 딸 慈儀왕후

▷부왕 때 파진찬으로 병부령 역임, 백제 정벌 때 태자 신분으로 큰 공

▷백제 부흥군 토벌

▷高句麗 정벌과 滅亡 - 나당연합군 평양성 공격으로 보장왕 항복, 평양에 안동도호부 설치

▷옛 백제 땅 금마저에 고구려 보장왕 서자 安勝을 정착시킴

▷金庾信, 78세로 사망

▷사비성에 소부리주 설치와 아찬 眞王을 도독에 임명 - 옛 백제 지배권 확보

▷당나라의 신라정벌 공격 - 설인귀와 이근행의 20만 대군을 격퇴

▷唐軍 축출과 三國統一완성 - 평양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이동한 당은 한반도에서 후퇴

▷국가체제 정비 - 소경제도 확대. 군사조직을 9서당 10정으로 개편

▷왕의 유언에 따라 화장 후 동해 큰 바위에 장사지냄 - 대왕암

 

신문왕 [神文王] - 31대. 11년(681~692년)

▷성은 金씨. 이름은 정명, 명지. 문무왕의 장남. 왕비는 일길찬 金欽運의 딸

▷소판 김흠돌의 반란, 진압

▷국학 설립 - 유교적 정치이념의 인재교육과 양성

▷봉성사와 망덕사 준공

▷서원소경(청주)과 남원소경(남원) 설치/5소경제 완성 - 왕경의 남쪽편재에 따른 불편해소

▷완산주(전주)와 청주(진주) 설치 - 9주제 완성

▷중앙의 군사제도인 9서당을 완비

▷녹읍제 폐지 --> 녹봉 차등지급

▷직계조상 태조대왕, 진지대왕, 문흥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을 제사 - 중국 5묘제 모방

▷감은사 완공 - 문무왕이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해 바닷가에 건립한 절을 완공

▷만파식적 설화 - 피리를 불면 왜적이 물러가는 등 신비한 피리 - 삼국유사

▷설총(薛聰)/元曉와 요석(瑤石)공주 사이의 아들 - 이두문 정리. [화왕계]

 

효소왕 [孝昭王] - 32대. 10년(692~702년)

▷성은 金씨. 이름은 理洪, 理恭. 신문왕의 장남

▷대아찬 元宣을 집사부 중시에 임명, 국정 전담

▷당나라 유학 고승 道證이 <천문도>를 가져옴 - 왕실의 권위를 높이는데 이용

▷당나라 인질로 잡혀간 김인문이 66세로 사망

▷서시전과 남시전 설치 - 지증왕 때의 동시전과 함께 경주의 3대 시장

▷이찬 慶永의 반란

▷향가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 - 삼국유사

 

성덕왕 [聖德王] - 33대. 35년(702~737년)

▷성은 金씨. 이름은 隆基, 興光. 신문왕의 차남. 왕비는 이찬 金順元의 딸 炤德왕후

▷효소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추대

▷아찬 金元訓을 중시로 임명한 이래 10명의 중시를 교체하며 왕권강화

▷영묘사 대화재 발생. 도성이 물에 잠기는 재해 - 즉위 2년

▷일본이 204명의 대규모 사신 파견, 외교 재개

▷매년 당나라에 사신파견(43회)과 조공 - 당현종이 “낙랑군공신라왕” 관작 부여

▷누각(漏刻)이란 물시계 처음 제작

▷토지개혁으로 세수증대 - 모든 백성들에게 丁田 지급

▷하슬라도(강릉)의 성인남자를 징발하여 북쪽국경에 장성축조 - 즉위 20년

▷모벌군성(월성) 축조로 일본 침입에 대비

▷혜초, 서역을 다녀와 [왕오천축국전]을 씀 - 즉위 26년

▷일본 병선 300척 동해안 습격, 격퇴 - 즉위 29년

▷당 요청으로 발해 공격, 군사 절반이 동사, 실패 - 당과의 국경을 패강(대동강)으로 확정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수용 - 공자와 10명 성인과 72제자화상을 국학에 봉안, 유학 장려

▷수로부인(水路夫人)과 관련한 설화 <海歌>와 <獻花歌> - 삼국유사

 

효성왕 [孝成王] - 34대. 5년(737~742년)

▷성은 金씨. 이름은 承慶. 성덕왕의 차남. 왕비는 이찬 김순원의 딸 惠明

▷이찬 정종을 상대등에 임명(귀족회의 담당), 행정책임 중시에 義忠과 후임에 信忠 임명

▷당나라 선진문물 적극수용 - 당나라 형도(邢瓙)가 [도덕경]을 전함

▷파진찬 永宗의 모반, 진압 - 귀족세력의 왕권약화 기도(?)로 추정

▷상대등 정종이 실권 행사 중 갑자기(?) 왕 사망 - 유언에 따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림

 

경덕왕 [景德王] - 35대. 23년(742~765년)

▷성은 金씨. 이름은 헌영. 성덕왕의 3남. 왕비는 서불한 김의충의 딸 滿月부인

▷효성왕이 아들이 없어 아우가 즉위

▷신라국운의 내리막길 시대 - 당나라도 안록산의 난, 사사명의 난으로 쇠퇴기

▷불국사 창건/대상 김대성 - 즉위 11년

▷녹읍제 부활/즉위 16년 - 귀족들의 축재와 왕권도전 계기

▷행정책임자의 집사부 중시(侍中으로 변경)를 통한 개혁시도

▷漢化정책 강행 - 모든 관작명칭 중국식으로 변경 - 상대등 金思仁의 비판상소와 사직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제작 - 김양상이 제작 책임

▷상대등에 萬宗, 시중에 金良相 임명 - 귀족세력의 대표적 인물

▷향가 - 忠談師의 <安民歌>와 <讚耆婆郞歌>, <도솔가>

▷表訓大師 설화 - 화엄종의 고승, 의상대사 제자, 천제에게 태자탄생을 부탁함

 

혜공왕 [惠恭王] - 36대. 15년(765~780년). 23세 사망

▷성은 金씨. 이름은 乾運. 경덕왕의 아들. 첫 왕비 이찬 김유성의 딸, 둘째 이찬 김장의 딸

▷8세에 즉위하여 왕태후인 만월부인의 섭정 - 태종무열왕의 직계로는 마지막 왕

▷일갈찬 大恭형제의 모반/ 즉위 4년- 왕권파 이찬 신유와 이찬 김은거가 진압(?) 추정

▷대아찬 金融의 모반/ 즉위 6년 - 김양상이 진압하고 실권 장악

▷왕이 자라면서 음탕한 노래와 여색에 빠져 정사문란

▷김양상을 상대등에 임명 - 즉위 10년

▷漢化된 관제 복고 - 김양상 주관

▷김은거의 반란, 이찬 염상과 시중 정문의 반란 - 김양상을 제거하려다 실패

▷이찬 金志貞의 반란 - 김양상의 귀족세력이 반란 진압과정에서 왕과 왕비까지 살해

 

선덕왕 [宣德王] - 37대. 5년(780~785년)

▷이름은 金良相. 내물왕의 10세손. 성덕왕의 외손자. 왕비는 각간 良品의 딸 구족부인

▷金敬信의 강력한 군사적 지원으로 왕 추대

▷상대등에 김경신 임명

 

원성왕 [元聖王] - 38대. 13년(785~798년)

▷이름은 金경신. 내물왕의 12세손. 왕비는 각간 神述의 딸 淑貞부인 김씨

▷선덕왕이 아들이 없자 태종무열왕 6세손 김주원과 왕위다툼에서 승리하여 즉위

▷왕위다툼 설화 - 2가지의 꿈 해몽

▷讀書三品科 설치 - 유교경전에 능통한 사람을 3품으로 나누어 관리등용

▷원성왕의 친족집단에 의한 권력 장악 - 신라 下代의 왕위는 원성왕계가 독차지

▷불교 중시 - 봉은사 건립(즉위 10년), 승관제도, 화엄종 사미승인 妙正을 편애

▷벽골제의 증축과 발해와의 통교 - 즉위 5년

▷당으로부터의 독자외교 추구 - 당나라 사신 설화

▷유언에 따라 동굴에 화장함 - 왕릉 추복을 위한 숭복사 건립

 

소성왕 [昭聖王] - 39대. 1년(799~800)

▷이름은 金준옹. 원성왕의 장자 김인겸의 아들. 왕비는 숙명의 딸 계화부인

▷대아찬의 관직으로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옴 -->파진찬 -->재상 -->시중 - 병으로 사직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거제도를 식읍으로 줌

▷우두주 도독의 이상한 짐승출현 보고 - 소와 같고, 키가 크고, 꼬리가 3척, 털이 없고, 코가 긴 짐승이 춘천에 나타남(?)

 

애장왕 [哀莊王] - 40대. 9년(800~809년). 22세 사망

▷이름은 金淸明, 重熙. 소성왕의 장남

▷13세 즉위로 숙부인 병부령 김언승이 섭정

▷해인사 창건/왕실직할 사찰 - 즉위 3년

▷일본과 국교재개 - 즉위 4년

▷公式이라는 법률 20여조 반포/ 즉위 6년 - 문란해진 정치질서 바로 세우려는 노력

▷사찰창건 금지 및 수리만 허용하는 교서/즉위 7년 - 귀족들의 축재수단 억제

▷숙부 김언승이 왕 살해

 

헌덕왕 [憲德王] - 41대. 17년(809~826년)

▷이름은 金언승. 소성왕의 아우. 왕비는 숙부인 각간 禮英의 딸 貴勝부인 김씨

▷친위세력 구축을 통한 반란대비

▷연이은 가뭄과 귀족들의 수탈로 농민들 동요, 봉기에 토벌로 대응 - 즉위 7년부터~

▷당나라 李師道의 반란에 3만 군사 파견/ 즉위 11년 - 무모한 출병

▷굶주린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먹음 - 즉위 13년

▷김주원 아들 김헌창의 반란/즉위 14년 - 웅천주에 국호를 長安이라 함, 웅진성에서 자살

▷김헌창의 아들 金梵文의 반란 - 북한산주 도독 聰明이 토벌

 

흥덕왕[興德王] - 42대. 10년(826~836년)

▷이름은 金수종, 景暉, 秀升. 헌덕왕의 동생. 왕비는 章和부인 김씨

▷장보고(張保皐)의 청해진에 군사 만 명을 주어 방비케 함 - 즉위 3년

▷최초로 茶 재배 - 大廉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 수입, 지리산에 파종

▷제도개혁 - 명활전 설치, 원곡양전 설치, 집사부를 집사성으로 변경하여 왕권 강화

▷불교성행 - 승려 丘德이 당나라에서 경전을 가져옴. 도승 150명 궁전에서 불공

▷흥덕왕과 앵무새 설화 - 짝을 잃은 앵무새가 슬퍼하다 죽는 것을 보고 노래를 지음 - 왕비가 일찍 죽고 왕비 없이 사는 자신의 처지와 유사

 

희강왕 [僖康王] - 43대. 2년(836~838년)

▷이름은 김제륭(金悌隆). 흥덕왕의 5촌 조카. 왕비는 忠恭갈문왕의 딸 文穆부인 김씨

▷흥덕왕 사후에 사촌동생 균정과 오촌조카 제륭이 왕위 다툼 - 제륭이 균정을 죽임

▷金明을 상대등에, 利弘을 시중에 임명

▷김명 이홍의 반란 - 왕은 자살

 

민애왕 [閔哀王] - 44대. 1년(838~839년)

▷이름은 金明. 흥덕왕의 조카. 왕비는 允容부인 김씨

▷균정계 세력인 아들 김우징이 장보고의 군사 5천명과 반란 - 민애왕 살해

 

신무왕 [神武王] - 45대. 0년(839~839년)

▷이름은 金우징. 흥덕왕의 오촌조카, 희강왕의 사촌, 균정의 아들.

▷장보고를 감의군사로 임명, 2천호의 식봉을 하사

▷해상왕 장보고 - 당나라에 건너가 장교생활로 군벌의 속성과 국제교역을 이해

 

문성왕 [文聖王] - 46대. 18년(839~857년)

▷이름은 김경응(金慶膺). 신무왕의 아들. 왕비는 박씨

▷장보고를 진해장군으로 봉함

▷弘弼의 반란, 진압 - 즉위 3년

▷장보고의 반란/즉위 8년 - 딸의 둘째왕비 좌절에 불만, 염장이 진압, 청해진 폐쇄

▷이찬 良順과 파진찬 興宗의 반란

▷이찬 金式과 大昕의 반란

▷숙부 김의정에게 왕위 계승 유언

 

헌안왕 [憲安王] - 47대. 4년(857~861년)

▷이름은 김의정(金誼靖). 신무왕의 이복동생. 균정의 아들

▷태봉 건국자 궁예가 헌안왕의 서자(?)

▷문성왕 때 병부령, 상대등, 서불한 역임

▷흉년으로 전국의 제방 수리

▷사위 김응렴에게 왕위계승 유언 후 병사

 

경문왕 [景文王] - 48대. 14년(861~875년)

▷이름은 김응렴(金膺廉), 의렴. 희강왕의 손자, 헌안왕의 사위. 왕비는 헌안왕의 딸 자매

▷당나라 사신파견

▷이찬 允興 형제의 반란, 처형 - 즉위 6년

▷이찬 김예(金銳) 金鉉의 반란, 처형 - 즉위 8년

▷이찬 近宗의 반란, 처형 - 즉위 14년

▷경문왕과 당나귀 -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감은사에서 자주 불공, 황룡사 9층 석탑 개축

 

헌강왕 [憲康王] - 49대. 11년(875~886년)

▷이름은 金정. 경문왕의 아들. 왕비는 의명(懿明)부인

▷황룡사에“百高座講經” 설치, 직접 수강 - 불력에 의한 국가와 왕실의 안녕 기대

▷국학에서 박사들한테 직접 수강

▷신하들과 월상루에 올라 왕도 사방을 시찰/ 즉위 6년 - 집은 기와집이고, 밥은 숯으로 짓는다는 말을 들음

▷信弘의 반란 - 즉위 5년

▷처용가(處容歌) - 헌강왕이 개운포(울산)에서 만난 용왕의 아들 처용이 지은 시

▷상수리(上守吏)제도 - 볼모로 지방에서 뽑혀와 경주에 머무르는 향리 - 삼국유사

▷최치원, 당나라에서 돌아와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 시랑이 됨 - 즉위 11년

 

정강왕 [定康王] - 50대. 1년(886~887년)

▷이름은 金황. 경문왕의 아들. 헌강왕의 아우

▷황룡사에서 백고좌강경을 베풀어 친행

▷이찬 김요(金蕘)의 반란, 토벌

▷여동생에게 왕위를 잇도록 유언 후 병사

 

진성왕 [眞聖王] - 51대. 10년(887~897년)

▷이름은 金만. 경문왕의 딸, 정강왕의 누이

▷주군에 1년간 조세면제, 황룡사에 백좌강경 설치/즉위 원년 - 민심수습책

▷위홍, 대구화상과 함께 향가를 수집하여 [삼대목]을 지음 - 즉위 2년

▷숙부이자 남편인 위홍의 사후부터 정치기강 문란 - 여왕의 음행과 뇌물, 아첨 배 활개

▷원종과 애노(哀奴)의 반란 - 즉위 3년

▷북원(원주)의 梁吉과 궁예(弓裔)의 반란/ 즉위 5년 -->명주 철원 점령/ 즉위 8년

▷완산주(전주)의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하여 무주(광주) 동남쪽 군현들을 차지 - 즉위 6년

▷적고적(赤袴賊)이 경주 서부 모량리까지 진출, 민가 약탈 - 즉위 7년

▷崔致遠이 시무10조를 올리고 아찬이 되나 시행은 좌절 - 왕권강화 안을 귀족들이 반대

▷조카인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줌

▷신라 최고의 지식인 崔致遠 - 12세에 당나라 유학, 18세에 당나라 빈공과 합격. 낙양 유 랑 때 시문에 몰두 - [今體詩]5수1권, [五言七言今體詩]100수1권, [雜詩賦]30수1권. 황소의 난 때 회남절도사 고변의 종사관 시절에 쓴 “討黃巢檄”은 뛰어난 문장으로 유명. 귀국해서는 진골세력에 밀려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외직으로 전전. 당시 수탈에 허덕이 던 농민들의 봉기로 전국이 혼란하여 당나라의 황소의 난 보다도 험악하여 굶어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있다고 탄식함. 한문학에 큰 업적을 남기고 변려문체(변儷文體)를 즐겨 사용했으며, 불교와 도교에도 상당한 조예. 저서로는 [신라수창군호국성찰각등루기], [제왕연대력], [계원필경], [법장화상전] 등

 

효공왕[孝恭王] - 52대. 15년(897~912년)

▷이름은 金요. 헌강왕의 서자. 왕비는 이찬 예겸(乂謙)의 딸

▷왕실의 권위는 떨어지고 궁예와 견훤이 패권을 다투는 시기

▷崔致遠 파직, 해인사에 은둔 - 즉위 3년

▷궁예는 청주와 충주이북지역을 장악하고 왕이라 칭함 - 즉위 5년

▷견훤은 일선군(선산) 이남의 10여개 성을 차지 - 즉위 11년

▷왕건은 금성 등 10여 군현을 공취 - 즉위 13년

▷왕건 진도군과 고이도성을 공취 - 즉위 13년

▷왕건 나주에서 견훤군을 대파 - 즉위 14년

▷대신 은영(殷影)이 효공왕의 첩을 죽임/ 즉위 15년 - 왕이 천첩에 빠져 정사를 외면함

 

신덕왕 [神德王] - 53대. 15년(912~917년)

▷성은 朴씨. 이름은 景暉. 8대 아달라이사금의 원손. 왕비는 헌강왕의 딸 義成왕후

▷경주지역만을 다스리며 신라의 명맥만 유지

▷견훤의 대야성 공격 - 즉위 5년

 

경명왕 [景明王] - 54대. 7년(917~924년)

▷성은 朴씨. 이름은 승영. 신덕왕의 아들

▷玄昇의 반란 - 즉위 2년

▷궁예를 축출한 왕건과 견훤의 패권다툼 시기

▷여러 가지의 변괴 - 사천왕사의 소상이 쥐고 있던 활시위가 저절로 끊어지고, 벽화의 개가 짓는 듯한 소리를 냈으며,

                              황룡사탑의 그림자가 사지 今毛의 집 뜰에 열흘이나 머무름

 

경애왕 [景哀王] - 55대. 3년(924~927년)

▷성은 朴씨. 이름은 위응. 신덕왕의 아들

▷고려에 사신파견 수교

▷유흥에 탐닉하고 방비에 소홀

▷왕건의 후백제 공격 때 군사파견/왕건요청 - 견훤은 경주 공격

▷견훤이 경주함락, 포석정에서 잔치중인 경애왕을 자결시킴, 왕비 강간, 김부를 왕에 앉힘

 

경순왕 [敬順王] - 56대. 8년(927~935년)

▷성은 金씨. 이름은 부(傅). 46대 문성왕의 후손

▷큰아들 마의태자(麻衣太子), 막내아들 범공(梵空)

▷고려 왕건을 신라의 도읍 금성으로 초대 - 즉위 5년

▷고려에 항복하는 문제를 대신들과 의논하고 항복을 청함 - 즉위 9년 10월

▷麻衣太子는 왕과 이별, 금강산에 들어가 바위틈에 집을 짓고 마의를 걸친 채 풀뿌리로 연명하며 일생을 마침

▷新羅 滅亡/ 즉위 9년 11월 - 경순왕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송악으로 가서 투항

▷왕건은 경순왕을 政丞公으로 봉하고 후대, 신라 도읍 금성을 경주로 고쳐 식읍으로 하사

▷왕건은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 후처로, 경순왕은 조카딸을 왕건의 후궁으로 줌

 

▲신라왕조 992년 존속 - 임금별 평균 17.7년 재위

 

△백제 660년 멸망, 고구려 668년 멸망, 발해 698~926년, 신라 935년 멸망

 

 

*참고자료: 한권으로 읽는 삼국왕조실록/ 임병주 지음/들녘

 

 

            <통일신라 영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