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우의 역사속의 WHY]조선이 세계 최고의 전략 미사일을 가졌었다는데…
태종때 화약개발 박차… 화차가 화통군 주력무기로 세종땐 휴대용 총통… "아이도 쏠 수 있을 정도"
그러나 이미 총통(銃筒)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태종은 즉위하던 첫 해에 고려 말 화약을 만든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崔海山)을 군기감 주부(종6품)로 특채해 본격적으로 화약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태종7년이 되면 군기감 소속 화약장들이 만든 화약이 '맹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년 후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나온다.
'임금이 해온정(解�亭)에 거둥하여 화차(火車) 쏘는 것을 구경하고 최해산에게 말 한 필을 하사했다. 또 포(布) 50필을 화통군(火筒軍)에게 주었다. 화차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 ▲ / CJ엔터테인먼트제공
문제는 그 다음 문장이다. '화차의 제도는 철령전(鐵翎箭-쇠화살) 수십 개를 구리통(銅桶)에 넣어서 작은 수레(小車)에 싣고 화약으로 발사하면 맹렬하여 적(敵)을 제어할 수 있었다.' 이 말은 고스란히 세종30년에 탄생했다는 신기전(神機箭)의 설명과 그대로 일치한다. 따라서 세종의 신기전은 태종의 화차를 개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오히려 태종 시대를 거치며 최해산 등이 이룩한 화약 발전으로 인해 세종 때에는 휴대용 총통 시대가 열렸다는 데 주목해야 한다. 상왕 태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22년(세종4년) 12월 북방 여진족 방어를 위해 떠나는 군사 중에서 강인한 자들을 선발해 총통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언급이 처음으로 나온다.
15년이 지난 세종19년(1437년) 군기감이 개발한 세총통(細銃筒) 150정을 실전에 배치한다. 세총통은 휴대와 사격이 용이해 "어린 아이와 여자라도 쏠 수 있다"고 돼 있다. 아마도 오늘날의 소총보다 조금 짧은 총통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세종27년에는 총통위(銃筒衛)를 신설해 일반 군인들보다 뛰어난 장정들을 투입했다. 이때는 세자(훗날의 문종)가 대리청정을 할 때였기 때문에 어쩌면 세종보다는 문종이 총통위 설치 등을 통한 정예군 육성에 더 적극적이었는지 모른다.
- ▲ / AP
'격목(檄木-화약 다지는 일종의 나무망치)·철퇴(鐵槌-쇠탄환)·철전(鐵箭-쇠화살)·화약(火藥)·화심(火心)·양약요자(量藥凹子)·장화기(藏火器)' 총통위 군사 1인이 갖춰야 할 무장이다. 격목은 적과의 접근전에서 육박전이 벌어질 때 사용하는 무기이고 철퇴나 철전은 그때 그때 필요에 따라 총통에 장착해 발사했다.
화약과 화심은 필수이고 양약요자란 말 그대로 일정한 양의 화약을 장착하기 위한 요(凹)자 모양의 계량기였고 장화기는 말 그대로 화약을 장약할 때 쓰는 보조기구이다. 그러나 늘 총통을 만드는 데 쓰는 철과 화약을 만드는 염초의 부족이 세종을 괴롭혔다.
이런 가운데도 총통개량작업을 지속한 끝에 세종30년(1448년) 200보에서 500보에 불과하던 사거리를 400보에서 1500보로 개량하고 총통의 무게도 훨씬 가벼워졌다. 그때 총통매뉴얼로 만든 것이 '총통등록(銃筒謄錄)'이다.
사실 신기전은 팔전총통(八箭銃筒) 사전총통(四箭銃筒) 장총통(長銃筒) 세총통(細銃筒)에 이어 맨 마지막에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리 비중이 큰 무기는 아니었다. 태종 때 만든 화차를 이때 신기전이라 하여 총통등록에 추가한 정도가 아닐까? 세종30년에 신기전에 관한 언급이 처음 나온다고 하여 이때 신기전을 발명한 게 아니란 이야기다. 이 막강한 총통위는 세조3년 폐지됐다. 반란의 우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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