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공부하기

[국사]大役事 일으킨 대원군 노련한 '건축의 정치가'

관악산☆ 2008. 8. 2. 11:23
[이한우의 역사속의 WHY]
大役事 일으킨 대원군  노련한 '건축의 정치가'

태조·태종·성종·광해군 등도 활용

 
TV의 사극(史劇)과 조선왕조실록의 사실(史實)은 너무 차이가 커 당혹스러울 정도다. 최근 드라마화되거나 방송중인 성종, 정조, 세종도 그렇지만 역시 픽션에 의해 가장 난도질당한 인물은 흥선대원군일 것이다. 소설이나 드라마를 통해 파락호(破落戶)의 상징처럼 돼버렸다. 파락호의 사전적 의미는 '재산이나 세력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은 난봉꾼'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흥선군(아들이 국왕에 오르기 전의 칭호)은 파락호였던 적이 없다.

다만 그런 소문이 야사에 실리고 소설화되고 드라마화된 과정에 대한 나름의 설명은 가능하다. 흥선군은 안동 김씨 세도정치가 극에 달했을 때 중인 신분의 '천하장안'이라는 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 등과 어울려 다녔다. 이들은 픽션에서 그리듯 '시정잡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시정잡배처럼 묘사된 것은 명색이 군(君)이라는 흥선군이 중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이 아무래도 양반 중심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파격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흥선군은 무엇보다 '건축물의 정치'를 이해했던 인물로 보인다.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 흥선군은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을 오랫동안 맡았다. 종친부는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최고의 지위를 갖는 기구였다. 그곳의 유사당상이란 상근 당상관(종3품 당상관)이었다는 뜻이다. 당상관이 가난했다는 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 무렵 그는 오히려 먼 인척관계였던 추사 김정희가 유배에서 돌아와 어려운 생활을 할 때 종종 물자를 대주기까지 했다.

흥선군 시절 그는 종친부의 기능 확대를 통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전주 이씨 중에서 태조 이성계의 후손들을 결집시키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거의 허물어져가던 종친부 건물의 중수(重修)를 시도한다. 그는 종친부 건물의 중수는 곧 종친세력의 결집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이 또한 흥선군이 납작 업드려 안동 김씨 세도가들의 눈치만 살폈다는 픽션과 일치하지 않는다. 아쉽게도 이 때 종친부 건물의 중수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이같은 포부는 고종이 집권한 이듬해에야 실현된다.

종친부 강화에 성공한 흥선대원군은 아들이 왕위에 오른 지 3개월도 채 안된 고종1년 2월11일 비변사와 의정부의 분리를 추진했다. 중종 때 여진족이나 왜적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설치한 임시기구였던 비변사(備邊司)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상설기구로 자리잡았고 그 후 의정부, 6조, 군부 등이 모두 비변사 당상이 되어 집단지도체제가 되었다. 오늘날로 치자면 계엄사령부에 가까운 기구가 조선말까지 이어졌고 특히 안동 김씨처럼 세도를 행사한 세력의 경우 비변사를 권력기반으로 삼았다. 의정부는 유명무실했던 것이다.

비변사와 의정부의 분리를 명한 지 1년쯤 돼가던 이듬해(고종2년) 1월27일 의정부에서는 쇠락할 대로 쇠락한 의정부 건물의 보수를 청했다. 물론 여기에도 대원군의 입김이 작용했다. 수렴청정 중이던 조 대비는 기다렸다는 듯이 "의정부 본청 건물뿐만 아니라 부속건물인 중서당(中書堂)까지 아주 새롭게 중건하라"는 엄명을 내린다. 의정부 중수공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된 듯 3월28일 조 대비는 "의정부가 새로 건축됐으니 비변사를 의정부에 합치도록 하라"고 명했다. 300년 가까이 이어지던 비변사의 계엄체제가 해체되고 의정부 중심의 정상적인 정치체제가 복원된 것이다.

종친부 중수를 통해 종친의 결속을 강화하고 의정부 중수를 통해 안동 김씨의 근거지였던 비변사를 사실상 혁파한 흥선대원군의 '건축의 정치'는 이제 왕권 확립의 상징을 향하게 된다. 비변사를 혁파한지 열흘도 안된 4월2일 대왕대비는 임진왜란 때 전소(全燒)돼 폐허가 되어버린 경복궁 중건을 명한다. 종친부 의정부 경복궁으로 이어지는 흥선대원군의 치밀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었다. 백성들의 원성 끝에 40여개월의 공사를 거쳐 고종5년 7월2일 고종은 경복궁으로 이어(移御)했다. 이로써 '건축의 정치'프로젝트는 일단락된다.

흔히 대역사(大役事)를 일으키는 제왕은 폭군의 혐의를 덮어쓸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경복궁을 지은 태조, 창덕궁을 지은 태종, 창경궁을 지은 성종, 인경궁과 경덕궁(경희궁의 전신)을 지으려 했던 광해군 등이 조선에서는 '건축의 정치'를 했던 국왕들이다. 광해군이야 논란이 되겠지만 태조 태종 성종을 폭군이라고 할 수는 없다. 특히 국왕이 아니면서도 치밀하게 '건축의 정치'를 구사한 인물로는 흥선대원군이 유일하다.
 
입력 : 2008.08.02 02:53 이한우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