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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사]고선지는 과연 고구려인이었나

관악산☆ 2010. 5. 15. 11:13
  • 유석재 karma@chosun.com
  • 입력 : 2010.05.14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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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고선지는 과연 고구려인이었나

    당나라의 '실패한 장수'?
    마지막까지 '황제의 충신'으로

    강원도 산속에 은거 중인 A교수가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이 한창 불거졌을 무렵의 일을 회고한 적이 있다. 자신의 고구려사 강연이 끝나자 울분에 찬 영화감독 B씨가 다가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고선지(高仙芝) 같은 고구려 장군들을 영화로 만들겠습니다." 그 말에 A교수가 격분했다. "뭐라! 고선지는 당나라에서 벼슬을 한 적장이 아닌가? 조선 사람이 일제 때 장군이 돼 진주만을 폭격해도 영화로 만들 작정인가?"

    누가 맞는지를 떠나 우리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고선지가 고구려인이었나?'라는 의문이다. 어느 나라의 국민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혈통보다도 정체성(identity)이라는 전제하에서다.

    그보다 먼저 짚고 가야 할 사항이 있다. 냉정히 말해 고선지는 '실패한 장수'였다. 당시 정세를 보면 당나라는 7세기 후반 이후 동쪽에서 고전을 거듭했다. 신라에 패하고 거란에 시달렸으며 발해 수군은 산둥반도를 공격했다.

    서쪽은 8세기에 들어서면 상황이 달라진다. 지금의 신강 (新疆) 쿠차(龜玆)에 있던 안서도호부를 중심으로 동서 교역 루트인 실크로드를 장악하려는 서침(西侵)에 나섰는데 그 중심 인물이 행영절도사 고선지였다.

    고선지는 747년 토번(吐蕃)을 격파하고 해발 4600m에 이르는 파미르 고원의 탄구령(坦駒嶺)을 넘어 파키스탄 북부의 소발률국(小勃律國)을 점령했다. '고선지가 한니발이나 나폴레옹보다 위대하다'는 말이 여기서 나왔다.

    한니발과 나폴레옹이 넘은 알프스 산맥보다 탄구령이 2000m나 더 높았던 것이다. 750년의 2차 원정에서 고선지는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던 석국(石國)을 침탈하고 개선했다.

    한국에선 별로 얘기하지 않지만 서구 학자들은 이때 잔혹한 약탈이 자행됐다고 본다. 당나라는 왜 소발률국과 석국을 침략했던 것일까? 모두 서쪽에서 흥기한 거대 세력과의 연대를 차단하려는 이유에서였다.

    그 세력이 아바스 왕조의 사라센 제국이었다. 이제 당나라와 사라센이 한판 붙는 동서 '문명의 충돌'이 바로 751년의 탈라스(Talas) 전투였다. 여기서 고선지 군대가 패하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하려던 당나라의 꿈은 좌절됐다.

    이후 중국은 두 번 다시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지 못했다. 탈라스 전투 때 제지술이 서방에 전파돼 고선지를 '유럽 문명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고선지의 의도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구당서'와 '신당서' 모두 고선지가 '원래 고구려인이었다(本高麗人也)'고 기록했고 상관인 하서절도사 부몽영찰이 그를 시기해 '고구려놈(高麗奴)'이라고 욕한 것으로 봐 그의 아버지 고사계(高舍鷄)는 고구려 유민이었음이 분명하다.

    정작 고선지가 자신을 고구려인이라고 했다는 기록은 없다. 755년 안녹산(安祿山)의 반란군이 수도로 진격해 오자 현종은 고선지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했고 고선지는 요충지인 동관(潼關)에서 가까스로 안녹산군을 막아냈다.

    이때 환관 변영성(邊令誠)이 고선지가 무단으로 작전지역을 변경했다고 무고하자 양귀비(楊貴妃)의 치마폭에서 놀아나던 현종은 어처구니없는 결정을 내린다. 칼잡이 100명을 변영성과 함께 동관으로 보낸 것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의 대란 속에서 수도를 방어하는 주력군 사령관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고선지는 변영성 앞에서 부하 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내게 죄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억울하다(왕·枉)고 외쳐라!"

    '왕―!'이라는 소리가 사방을 진동했다. '고선지 평전'을 쓴 지배선 교수는 "휘하 사졸들이 호응한다면 칼잡이들을 없애고 황명(皇命)을 거부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선지가 고구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졌다면 다음 행보는 뻔한 것이었다. 당장 창 끝을 거꾸로 돌려 장안성에 있던 현종과 양귀비를 도륙하고 87년 전 당군의 말발굽에 평양성이 짓밟혔던 조상들의 원한을 갚아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는 황명을 받아들이고 진중에서 참수됐다. 이제 우리는 대단히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때가 됐다. 그것은 고선지가 최후의 순간까지도 당나라 황제의 충신이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