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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어 작전명령서 공개로 친북좌익세력의 北侵주장 허물어져

관악산☆ 2010. 6. 19. 19:49

소련어 작전명령서 공개로 친북좌익세력의 北侵주장 허물어져
 
흐루시초프, “김일성은 괴뢰가 아니라 한국전쟁을 주도한 자”
수정주의자들의 ‘남침유도설’은 전쟁발발 책임 희석하기 위한 것
美, 6·25전의 한국군을 “독립전쟁 전 해의 미군 수준”이라고 평가
 
李春根
⊙ 1952년 출생.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美텍사스대 정치학 박사.
⊙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실장, 자유기업원 국제문제연구실장,
    同 부원장 역임.
李春根 이화여대 겸임교수,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연구위원 (choonkunlee@hotmail.com
 우리 민족이 당면했던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제일 처절하고, 개탄스럽고 또 한편 창피한 전쟁이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3년1개월2일 동안 한반도 전체를 피로 물들였던 ‘6·25사변’ 또는 ‘한국전쟁’이라고 불리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제2차세계대전 이후 초(超)강대국으로 등장한 소련의 적극적 지원을 받은 북한의 김일성(金日成) 집단이 민족 해방이라는 미명하에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눈 동족상잔(同族相殘)의 수치스런 전쟁이었다. 언제라도 ‘우리민족끼리’라는 구호를 앵무새처럼 외치는 북한과, 국내에 있는 북한 추종자들은 수백만 동족을 살상한 한국전쟁을 무어라 변명할까?
 
  그동안 한국전쟁에 대해 이 전쟁은 북침전쟁이라느니, 미국이 북한의 침략을 유도한 전쟁이라느니, 이 전쟁은 전쟁이 아니라 민족통일을 위한 혁명이었다는 등등 별별 해괴한 설명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김일성의 요청, 소련의 적극적 지원, 중국의 적극적 협조로 계획, 시행됐던 침략전쟁이었다는 것이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에 의한 최선의 해석이다.
 
 
  開戰 3일 만에 수도 빼앗기는 군사력으로 북침?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라는 정확한 시점에서 시작되었지만,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무렵부터 이미 전(全) 세계의 좌익(左翼)세력들은 자신들의 이념적 틀에 맞도록 한국전쟁의 원인과 과정 및 결과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나고 10여 년이 경과한 1965년 당시 한국 전쟁관련 출판물은 그 종류별로 이미 1만 편을 넘어섰었다. 한국전쟁 관련 문헌을 가장 철저히 연구한 학자 중의 한 명인 김학준(金學俊) 박사는 그 1만 편 중 한국전쟁 연구에 도움이 되는 글은 약 500~800편 정도라고 평가한다. 이처럼 한국전쟁에 대한 왜곡 현상은 비단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소련·중국, 그리고 북한의 관영 매체와 학자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한 바로 그 순간부터 한국전쟁은 한국과 미국의 침략 공격으로 인해 발발한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남침(南侵) 직후, 북한 방송은 남한이 먼저 북침(北侵)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이를 격퇴하기 위해 반격한다는 김일성의 선전포고 성명을 방송했다.
 
  물론 공산권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 및 학계(學界)에서는 남침설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온갖 정황 증거가 남한이 북침했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들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리고 인류와 전쟁의 역사를 모두 살펴본다 해도, 선제(先制)공격을 감행한 나라가 전쟁 개시 3일 만에 자신의 수도를 빼앗기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전쟁을 도발한 적은 없었다. 수백 대의 최신형 탱크와 전투기로 무장한 북한을 향해 단 한 대의 탱크와 전투기도 보유하지 못했던 남한이 선제공격을 했다는 것은 군사 상식에 어긋난 허황된 주장일 뿐이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북한의 군사력 증강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북한의 침략에 대응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해 달라고 미국에 애타게 호소하던 중이었다. 아무리 공산주의자들이 한국전쟁을 북침전쟁이라 우겨도 상식적인 정황 증거들은, 한국전쟁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사전에 잘 계획된 침략전쟁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한국전쟁의 원인을 왜곡한 수정주의
 
1980년대 한국 젊은이들을 오도한 브루스 커밍스(왼쪽)의 <한국전쟁의 기원>(오른쪽).

  전쟁을 연구하는 경우 가장 먼저 관심을 두게 되는 주제는 전쟁의 원인에 관한 것이다. 전쟁의 원인에 관한 조사 연구는 전쟁 도발의 당사자가 누구냐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 개인 간의 싸움을 조사하는 경우에도 누가 먼저 폭력을 행사했느냐가 가장 중요한 질문인 것과 마찬가지로, 전쟁을 연구하는 중요한 이유는 침략자를 가려내어 역사적으로 단죄(斷罪)한다는 도덕적 목적을 포함하고 있다.
 
  한국전쟁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전에 치밀한 계획에 입각해서 시작한 침략전쟁’이라는 학설을 ‘전통주의’라고 한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전통주의 학설이 도전을 당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월남전 당시 미국의 대외(對外)정책에 격렬히 항거했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대학을 다녔고, 좌파(左派) 사상의 세례를 받은 미국의 한 세대가 대학·언론 및 사회의 주요 세력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이들은 “소련보다는 미국이 더욱 침략적인 나라”라면서, “제2차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국가들이 오히려 방어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시각을 ‘수정주의’(revisionism)라고 한다.
 
  수정주의자들은 한국전쟁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들 좌파 수정주의자는 공산주의 진영이 줄줄이 붕괴되는 1980년대 후반까지 상당히 큰 학술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수많은 젊은이도 이 학설에 큰 영향을 받았고, 그 여파는 아직도 한국 사회를 갈등과 분열로 몰아넣고 있다.
 
  물론 수정주의는 지금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이유는 수정주의 좌파가 제시하는 논설의 학문적 수준이 빈약하고 척박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신문기자였던 스톤(I.F.Stone)이 한국전쟁이 진행 중인 1952년 저술한 <한국전쟁 비사>(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를 필두로, 플레밍(Ian Flemming), 콜코(Gabriel Kolko) 등 좌익계열 학자들이 미국을 제국주의라고 보는 관점에서 서술한 냉전(冷戰)시대 역사 해설, 그리고 수정주의의 수정이라고 말할 수 있는 브루스 커밍스(Bruce Cummings)의 <한국전쟁의 기원>(Origins of the Korean War, 1981년 간행)에 이르기까지 상당수 좌익 계열의 학자와 지식인은 ‘한국전쟁은 북한과 소련의 도발에 의해 야기된 침략전쟁’이라는 ‘전통적인 해석’을 부정하는 논리를 제시했다.
 
 
  수정주의는 좌파의 주장을 상호 중복 인용한 데 불과
 
  수정주의는 애초 한국전쟁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전쟁을 분석하려는 목표보다는 미·소(美蘇)냉전이라는 지구적 차원의 국제정치를 재(再)조명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학술적 분파(分派)다. 수정주의 학파의 가장 큰 특징은 한국전쟁의 원인에 대한 정교한 학문적 분석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자의 관점에서 한국전쟁의 원인과 결과를 공산주의자들에 유리하게 변호했다는 데 있다.
 
  이들은 좌익적 관점에서 세계를 본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제국주의의 전형으로 공격적인 반면, 소련의 행동은 미국의 행동에 대한 방어적인 반작용일 뿐이라고 보려 한다. 이들은 “소련이 동유럽, 북한 등을 공산화한 것은 소련 공산주의의 팽창정책의 결과가 아니라 소련보다 훨씬 침략적인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이라고 두둔한다. 이들은 한술 더 떠서 소련 주변에 있는 나라들이 공산화된 것은 소련의 무력(武力)과 위협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각 지역의 자발적인 사회주의 혁명 노력의 결과라고 정당화한다.
 
  수정주의 학설이 대두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객관적인 사료(史料)들에 의존하지 않는 수정주의 학파의 역사 서술 방식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다. 스투억(William Steuck) 등 신예 학자들이 수정주의 비판에 앞장섰다. 이들은 “수정주의자들은 새로운 사료를 발굴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념적 사유(思惟)방식에 맞는 다른 좌파 이론가들이 쓴 글들을 상호 중복 인용하는 형태로 자신들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해 나갔다”고 비판했다.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 자신과 주장이 같은 사람들의 글만 잔뜩 인용하는 것은 학문적인 파탄일 뿐이다.
 
 
  소련어 남침명령서 공개
 
  북한은 아직도 ‘북침설’(즉 남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을 한국전쟁 발발에 관한 공식적 입장으로 강변하고 있다. 국내에도 이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누가 일으켰는가에 대한 논쟁은 사실상 끝났다. 과격한 친북(親北)주의자들조차 한국전쟁은 북한이 먼저 시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근거가 백일하에 공개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전쟁을 도발했다는 사실을 명백히 밝혀준 구(舊)소련의 외교자료들은 고르바초프 대통령 재임 당시부터 부분적으로 공개되기 시작했다. 1994년에는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한국전쟁에 관한 소련 공산당 및 정부의 비밀자료 상당량을 한국정부에 넘겨줬다.
 
  이렇게 해서 새로 공개된 한국전쟁에 대한 자료들은 “김일성은 (소련의) 괴뢰라기보다 한국전쟁을 주도한 자”라는 <흐루시초프 회고록>의 주장이 근거 있는 주장임을 확인시켜 줬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스탈린이 전적으로 주도했고, 김일성은 오로지 괴뢰로서 침략전쟁을 대행(代行)을 뿐”이라는 전통주의 학설은 부분적으로 수정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통주의 이론을 일부 수정하게 만든 한국전쟁 관련 소련 외교자료의 공개는, 수정주의의 학설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는 계기가 됐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 북한군에게 남침명령을 하달한, 소련군부가 작성한 공격명령서가 발굴, 공개되면서 억측과 추측에 의한 역사 분석, 자신들의 세계관에 적합하도록 각색된 역사해석들은 맥없이 허물어졌다.
 
  한국전쟁 관련 소련 비밀문서 공개는 1960년대 이후 미국의 역사학계를 풍미했고 1980년대 이후 한국의 친북좌익세력을 사로잡았던 수정주의를 완전히 허물어버렸다. 소련어로 작성된 북한군 작전개시 명령서까지 공개된 판국은 한국전쟁의 가장 큰 논쟁, 즉 “누가 전쟁을 일으켰는가?”의 문제를 더 이상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없게 됐다.
 
 
  남침유도설의 오류
 
  그러자 한국의 친북좌익세력은 새로운 궤변(詭辯)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들의 역사 해석은 과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였다는 사실이 다시 증명된 것이다. 남침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친북좌익세력이 제시한 한국전쟁에 관한 궤변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뉜다.
 
  첫째, “북한을 비롯한 공산진영이 먼저 공격함으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미국이 남침을 유도(誘導)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소위 ‘남침유도설’이다.
 
  이 주장은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美)국무장관의 미국의 극동(極東) 방위선에 대한 선언에 주목한다. 그날 애치슨 장관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열도(列島), 일본열도, 오키나와를 잇는 선(線)으로 한정했다.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빼놓은 것이다.
 
  친북좌익세력은 애치슨 선언을 미국이 북한 및 소련이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인한 ‘음모’라고 본다. 당시 공산주의 팽창을 역전시킬 계기를 찾고 있던 미국이 북한을 유혹함으로써 전쟁을 도발토록 만들었고, 미국은 이를 빌미로 공산주의자들을 무력으로 되받아침으로써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대로라면, 북한은 세계전쟁 사상 상대방의 꼬임에 속아 전쟁을 도발한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나라가 된다. 김일성은 이들이 외치는 것처럼 ‘위대한 수령’이 아니라 미국의 꼬임에 넘어가 수백만 명을 죽이고 북한을 비참하게 만들었던 형편없는 수준의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들이 떠받드는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을 그렇게 모독해도 될 일인가?
 
  또한 애치슨 선언은 한국을 미국의 극동 방위선에서 ‘제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은 미국의 극동방위선 속에 확실하게 ‘포함’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다. 즉 미국은 공산주의자들에게 한국을 무력공격하라고 유인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건드리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의도를 전달하려 한 것이다.
 
 
  전쟁 도발 책임 희석시키는 內戰說
 
  미국이 신속하게 개입했다는 사실, 미국의 반격이 38선에서 멈추지 않고 38선을 넘었다는 사실은 친북좌파들이 제시하는 남침 유도설의 또 다른 근거들이다.
 
  그러나 전쟁은 한번 시작되면 그 전개 과정에서 스스로의 역동성(dynamics)을 가지게 된다. 전쟁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기 때문에 전쟁의 와중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양민학살 등의 제반 사건들이 늘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에 애초에 의도한 대로 진행되는 전쟁은 없다. 미국이 진정 음모론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 했다면 그것은 당시 세계의 변두리였던 한국에서가 아니라 유럽에서였어야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두 번째 궤변은 “한국전쟁은 국제전쟁이 아니라 내전(內戰·Civil War)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 혹은 ‘혁명’으로 간주하게 될 경우,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느냐의 문제는 더 이상 중요한 이슈가 되지 않는다. 압제당하는 백성들이 독재자에 대항하는 혁명의 과정에서 폭력을 누가 먼저 행사했느냐의 문제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친북좌익세력도 한국전쟁은 ‘민족해방전쟁’이었다는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민족해방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달성하는 데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느냐의 여부는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강변한다.
 
  그래서 친북좌익세력은 ‘전쟁의 원인’(causes of war)이라는 용어 대신, ‘전쟁의 기원’(origins of war)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럼으로써 이들은 ‘전쟁은 단지 수단일 뿐’이라는 레닌의 견해에 동조한다.
 
 
  “6·25 전 한국군은 1775년의 미군 수준”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당시 북한군의 무장력은 전적으로 소련의 적극적인 지원에 의한 것이었다.
 
  북한군은 한국전쟁 발발 당시, 세계 전사상(戰史上) 가장 효율적인 탱크로 평가받는 소련제 T-34 탱크 242대, 120mm 포 225문, 82mm 포 1141문, 61mm 포 360문, 122mm 곡사포 172문, 76mm 곡사포 380문, 85mm 방공포 12문 등 각종 포 3040문, 야크(Yak)-9 전투기 100대 이상을 보유하고 있었다. 북한은 심지어 IL-10 폭격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특히 소련은 1949년부터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정찰기 10대, 야크전투기 100대, 폭격기 70대, T-34 탱크 100대를 집중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이 이처럼 북한을 신식 군대로 키운 결과, 북한의 민족보위상(국방부 장관) 최용건(崔庸建)은 “비행기, 탱크, 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 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했다(1950년 1월 21일).
 
  반면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1950년 6월 25일, 한국군은 105mm 곡사포 91문을 포함해 총 1191문의 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탱크는 한 대도 없었다. 전투기도 전혀 없었다. 북한이 176문을 보유한 자주포(自走砲)를 한국군은 한 문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자주포와 탱크가 없는 나라가 선제공격을 할 수 없다는 것은 군사의 기초상식이다.
 
  미국의 평가에 의하면 한국전쟁 직전, 한국군의 군사력은 미국이 독립선언을 하기 1년 전인 1775년의 미군(美軍) 수준이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은 ‘6·25의 노래’ 가사처럼 소련제 무기로 중무장한 적을 맞아 맨주먹 붉은 피로써 싸운 처절한 전쟁이었다.
 
 
  6·25는 양차대전 다음으로 참혹한 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난 사람들이 이제 환갑이 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도 아직 한국전쟁에 관한 논쟁이 끊이지 않는 것은 우리 민족의 불행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좌파들은 한국전쟁에 관한 온갖 궤변을 늘어놓았지만, 한국전쟁이 남침전쟁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1990년대 초반 공개된 소련 비밀문서는, 김일성은 괴뢰보다 죄질이 훨씬 더 나쁜 ‘전범(戰犯)’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주었다. 그러자 친북좌익세력은 곧바로 북한의 전쟁도발을 두둔하기 위한 궤변들을 찾아냈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내란도 아니고 미국이 침략을 유도한 전쟁도 아니다. 한국전쟁은 인명피해 규모로 볼 때, 근대국가 체제가 수립된 1500년 이후 벌어진 전쟁 가운데 7번째로 큰 전쟁이었다. ‘1년 동안 발생한 인명피해 규모’인 치열도(severity)로 보면, 양차 세계대전에 이어 세계 제3위의 처참한 전쟁이었다. 우리 민족 구성원의 10%가 목숨을 잃은 전쟁이었다. 또 당대 세계의 강대국이 모두 참전한 ‘강대국 간 전쟁’이기도 했다.
 
  말끝마다 ‘우리 민족끼리’를 외치는 북한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가 다르다는 이유로 동족의 가슴에 외국제 무기를 들이댄 이 참화(慘禍)를 정당화하는 어떠한 논리도 있을 수 없다.
 
  지난 3월 26일 발발한 천안함 사건이 북한의 어뢰 공격에 의한 것이 거의 확실하게 된 오늘, 천안함 침몰 원인이 한국과 미국 측에 있다고 우기면서 북한을 두둔하고 있는 세력을 우리는 보고 있다. 대한민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이 외부에는 물론 내부에도 적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아야 할 때이다.⊙